“죽음과 노역과 악

인간은 자의식을 가진 유일한 존재다. 자의식 덕분에 인간은 스스로 나약하고 무능력한 존재라는 것, 그리고 죽음을 피할 수 없는 비극적인 존재라는 걸 알게 되었다. 이런 자의식은 필연적으로 고통을 야기한다. 그 고통으로 인해 이기적이고 즉각적인 만족을 중요시하는 생각, 즉 편의주의에 빠져든다.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사회와 자연의 무자비한 횡포가 삶을 고통스러운 비극으로 만든다고 생각하는가? 사회와 자연은 사실 고통의 유일한 원인이 아니다. 심지어 주된 원인도 아니다. 악의 문제를 생각해 봐야 한다. 불확실함이 가득한 세상이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인간들의 비인간적인 행위가 훨씬 심각한 문제다. 이런 이유로 희생의 의미는 더욱 복잡해진다. 단지 가난과 죽음을 극복하기 위해 노동하고 희생하며 현재의 만족을 포기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악을 극복해야 하는 과제와도 관련이 있다.

다시 아담과 하와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우리 조상이 눈을 뜬 대가로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이후 그들의 후손, 즉 우리의 삶은 가혹해졌다. 낙원 이후 역사의 세계로 접어들면서 인간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끔찍한 운명이었다. 괴테는 이 운명을 “인간의 창의력, 그리고 끝나지 않는 노역”이라고 표현했다.131 지금껏 살펴본 것처럼 인간은 일을 한다. 인간은 자신이 죽음과 질병을 피할 수 없는 나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고 자기를 지키기 위해 일한다. 미래에 일어날 일을 알고 있다면 그것에 대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미래를 애써 부정하며 두려움에 빠져 살아야 한다. “따라서 더 나은 내일을 위해 오늘의 쾌락을 희생한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금지된 열매를 먹고 눈을 떴을 때 깨달은 것은 죽음과 노동의 필연성만이 아니었다. 축복이었는지 저주였는지 모르지만, 선과 악도 구분하게 되었다.

나는 이 이야기의 의미를 이해하기까지 수십 년이 걸렸다. 내가 찾아낸 교훈을 정리하자면 이렇다. 우리 자신이 나약하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순간, 모든 인간이 나약하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는다. 두려움과 분노, 원망과 원한이 무엇인지 알고, 고통의 의미를 이해한다. 그런 감정이 내 안에서 어떻게 생기는지 깨우치면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런 감정을 느끼도록 할 수 있다. 즉 자의식이 있어서 다른 사람들을 의도적으로 교묘하게 괴롭힐 수 있게 된 것이다. 아담과 하와의 두 아들,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에서 인간이 새로 알게 된 것들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가 드러난다.

인간은 처음 세상에 등장했을 때부터 신에게 제물을 바치는 법을 배웠다. 돌 제단을 만들어 집단의식을 치르고, 엄선한 동물이나 고기 중에서 가장 귀한 부위를 제물로 바쳤다. 그 제물은 불을 통해 영혼을 상징하는 연기로 바뀌어 하늘로 올라간다. 이런 식으로 만족 지연이란 개념을 극적으로 연출하면서 미래가 지금보다 나아지기를 바랐다. 하나님은 아벨의 제물을 받았고, 그 덕분에 아벨은 영화를 누렸다. 카인의 제물은 거절당했다. 카인은 극도의 분노와 질투로 불타올랐다. 당연한 반응이다. 희생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버림받고 실패한다면 누구든 이렇게 반응하지 않겠는가. 카인은 원한과 앙심을 품기는 했지만 자신에게 잘못이 있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극단적으로 반발하지는 않았다. 만약에 카인이 현재의 쾌락을 실제로 포기했다면, 힘들게 일하고도 아무 보상을 얻지 못했다면, 노력했음에도 거절당한 것이라면 상황은 더욱 안 좋았을 것이다. 그랬으면 카인은 현재도 잃고 미래도 잃은 것이다. 무의미한 노동과 희생을 한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는 세상이 어둡게 느껴지고 영혼은 강렬하게 저항한다.

카인은 하나님의 거부에 분노한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비난한다. 하나님이 창조한 것들을 저주한다. 카인의 반응은 적절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모든 잘못이 카인에게 있다는 걸 분명히 지적한다. 뻔히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죄를 범했기 때문에 그 대가를 치르는 것이라고 카인을 꾸짖는다.132 카인은 하나님에게 이런 대답을 듣고 싶은 게 아니었다. 하나님은 사과와 위로를 하기는커녕 오히려 호되게 질책했다. 카인은 마음의 상처까지 입는다. 하나님의 꾸중에 격분한 카인은 복수를 계획한다.

대담하게도 창조주에게 대항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무모한 선택이었다. 카인은 어떻게 해야 하나님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지 알고 있었다. 결국 카인도 자의식을 지닌 인간이었다. 꾸중을 듣고 창피를 당하자 견디기 힘든 감정에 휩싸였다. 카인은 아벨을 무참히 살해한다. 아벨은 친동생이자 카인이 닮고 싶어 하던 이상적인 인물이었다. 카인은 자신과 모든 인류, 더 나아가 하나님까지 한 번에 궁지에 빠트리는 최악의 범죄를 저질렀다. 끔찍한 범죄를 통해 세상을 혼란으로 몰아넣으며 복수에 성공했다. 또 용납할 수 없는 삶의 변덕에 저항했고, 불합리한 삶의 조건에 근본적인 반감을 표시했다. 카인의 피를 물려받은 후예들은 더 사악해졌다. 카인은 실존적인 분노에 휩싸여 단 한 번 살인을 저질렀지만, “카인의 후손인 라멕은 한 번의 살인에서 멈추지 않는다. 라멕은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카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창세기> 4장 23~24절)라고 말한다. <창세기>에서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라고 소개된 ‘두발가인(투발 카인)’은 《성경》적 계산에 따르면 카인의 7대손이다. 그는 최초로 전쟁 무기를 만든 인물이었다. 그리고 곧 대홍수가 닥친다. 사건들이 이런 순서로 배열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악은 자의식과 함께 세상으로 들어온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내린 노역이라는 저주는 그것만으로도 감당하기 힘든 처벌이었다. 하와에게 내린 분만의 고통과 남편에게 의존하는 삶이라는 저주 역시 마찬가지다. 이런 처벌은 궁핍과 박탈, 폭력으로 점철된 삶의 비극을 암시한다. 그리고 누구도 질병과 죽음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처참한 현실을 깨달으면 때로는 강직하고 용감한 사람들도 삶에 적대감을 갖는다. 하지만 인간은 온갖 비극을 참고 견딜 만큼 충분히 강하다.”

“나는 심리학과 교수와 임상 심리학자로 일하며 많은 사람을 만나면서 어떤 비극에도 흔들리거나 무너지지 않고 굳건히 삶을 지켜 내는 놀라운 광경을 수없이 목격했다. 인간은 지진과 홍수, 가난과 암 등 어떤 시련도 감당할 만큼 충분히 강하다. 그러나 세상이 주는 시련과는 차원이 다른 고통이 있다. 바로 인간의 악함이 만들어 내는 고통이다. <창세기>에서 자의식 형성을 우주적 규모의 대재앙으로 그리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에덴동산에서 영원히 쫓겨나 다시는 돌아갈 수 없으며 앞으로 태어날 모든 인간은 원죄를 안고 태어나게 된다는 점에서 우주적 규모의 재앙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선과 악을 구분하게 되었다는 점이 가장 큰 재앙이었다.”

“인간이 의도적으로 악한 짓을 하면 어떤 역경에도 흔들리지 않던 정신을 무너뜨릴 수 있다. 술에 취해 난동을 부린 남자 친구의 살기 어린 표정에 충격을 받아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시달리던 내담자가 있었다. 겁에 질린 그녀의 모습이 지금도 생생히 기억난다.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한”(<창세기> 4장 5절) 그녀의 남자 친구 표정은 여자 친구를 해치려는 의식적인 욕망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녀는 나이에 비해 너무 순진했다. 오랫동안 외상성 신경증에 시달린 이유가 그런 순진함의 영향이기도 했지만, 중요한 문제는 그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사악한 행위는 강인한 사람에게도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남길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사악한 행위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단지 삶이 힘들고 가혹해서 사악함이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참담한 실패를 겪었다고 해서, 혹은 그로 인한 실망과 좌절이 크다고 해서 사람이 항상 사악해지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희생과 노력이 계속해서 거부당하면(제대로 된 노력이나 희생이 아니더라도) 상황이 달라진다. 이런 경우에는 뒤틀리고 일그러져 진짜 괴물처럼 변할 가능성이 크다. 의도적으로 사악한 짓을 저지르고,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괴롭히기 시작한다. 고통과 아픔을 주기 위해 어떤 짓도 마다하지 않는다. 어설픈 노력과 희생, 그런 희생을 거부하는 현실 혹은 절대자, 거부당했다는 분노와 원망, 좌절에 빠져 치밀어 오르는 복수심, 더 어설픈 희생과 반복되는 거부……. 이런 악순환의 고리가 완성된다. 악순환의 최종 정착지는 지옥이나 다름없는 곳이다.”

“영국 철학자 홉스의 말처럼 “삶은 지저분하고 야만적이다. 그리고 짧다”. 그러나 악한 짓을 저지르는 인간의 속성 때문에 삶이 더욱 황폐해진다. 야만적인 면을 어떻게든 해결해야 한다. 이것이 삶의 본질적인 문제다. 무엇을 어떻게 희생하느냐를 고민하는 이유는 삶의 고통뿐만 아니라 사악함까지 줄이기 위해서다. 사악함은 고의적으로 최악의 고통을 유발한다.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적대적인 형제 관계, 영웅과 반영웅을 묘사한 원형적인 이야기다. 카인과 아벨은 인간의 양면성을 상징한다. 하나는 선을 지향하려는 마음이고, 다른 하나는 사악함에 끌리는 마음이다. 아벨은 진실을 추구하는 영웅이지만 결국 적대자인 카인에게 패배한다. 아벨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데 성공했다. 하나님이 보기에 흡족한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다. 아벨은 그야말로 불가능에 가까운 과업을 이룬 영웅이었다. 하지만 그 어려운 일을 해낸 아벨도 결국 인간의 사악함 앞에 무릎을 꿇었다. 아벨은 원형적인 미완성의 영웅이었다. 아벨은 순수하고 카인은 교활했을지도 모른다. 변명이나 이유는 중요하지 않다. 어떤 변명도 무의미하다. 하나님이 아벨의 제물을 흔쾌히 받았음에도 악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수천 년이 지난 후 비로소 해결책이 나왔다. 악의 문제를 포괄적으로 다룬 해결책이다. 그리고 이번에는 영웅이 승리를 거두었다. 그 주인공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다.”

Excerpt From: 강주헌. “12가지 인생의 법칙-본문.” Apple Books.

abel